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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 by 레이첼 나오미 레멘

by beactive71 2024.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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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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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레이첼 나오미 레멘
출판
이루파
출판일
2005.01.18

 

우리의 삶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우리 자신을 규정한다. 때로는 나의 의도대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지만 아주 많은 이야기들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전세계를 종횡무진 옮겨다니며 매일 새롭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자신이 태어난 곳 주변의 좁은 범위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한히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야기의 생산자일 것이다. 이야기의 규모나 다양성과는 상관 없이 저마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의미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책이다. 또한 삶의 불청객이라 여기는 고통과 슬픔, 고난, 질병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기피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 온전히 경험하고, 받아들이고, 깨달으면서 삶의 소중한 부분으로 기꺼이 포용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고통과 상처의 시기에도 우리는 웅크리거나 숨지 말고 우리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우리 모두의 삶은 조금은 더 따뜻하고 덜 외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책 속 문장들

살아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이야기에 잠시 머물거나, 반추해 보거나, 음미하거나, 놀라움에 넋을 잃기도 한다. 인생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길을 가라고 재촉하지만, 우리에게는 멈추어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서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어 서기 전까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뒤에다 버려두고 못 본 척하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데 몰두한다. 멈추어 선 후에야 비로소 그런 삶의 문제는 살아있는 한 계속 남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계속 많은 문제와 사건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얻게 되며 그때마다 인생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었음을 아는 지혜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길이기도 하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삶의 사건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고 음미하는 법을 잊은 것이다. 

 

대개의 이야기 안에는 감추어진 비밀이 들어 있어 깊이 귀를 기울이면 그 비밀의 문이 살며시 열린다. 이 이야기 안에는 진정 우리가 누구인지, 왜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는지,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아는 비밀이 담겨 있다. 

 

가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러달라고 청하면, 살아오면서 어떻게 성공을 했고, 어떤 일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진짜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무엇을 했고, 어떤 것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겪으면서 어떻게 느꼈고,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두려움을 지녔는지, 그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이고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다.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진실하다.

이야기는 그들이 체험한 삶의 사건에 대한 나름의 이해이지 그것이 사건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하기에 같은 사건도 다르게 체험한다.

 

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우리가 체험한 사건보다도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사건에 우리가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며 그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삶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며 그 순간에 누군가의 삶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인생의 스승과 함께 나란히 식탁에 앉게 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의미는 그 사람이 지닌 의미와 다를 수도 있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실'은 우리에게 지식을 전달하지만 이야기는 우리를 지혜로 이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상담가로서 암 환자나 다른 치명적인 병을 지닌 환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들로부터 나는 일상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일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의 감미로움, 곁에 있는 친구의 의미, 고통 없이 보낼 수 있는 단 한 시간이 주는 축복에 관한 일이다. 그런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경험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드는 소재들이다. 우리가 만약 자신의 삶은 너무나 평범해서 이야기 거리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삶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심오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점차 이런 만족감에 도달하는 열쇠는 많은 이야기와 기억들로 가득 차 있는 내면의 세계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만족감과 평화는 외적인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체험하고 그 내면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고 나누는 풍요로움에서 오는 것이다. 

 

사고나 자연재해로 불행을 겪은 사람들은 인생의 무상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경험상 인생은 갑자기 변할 수도 있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끝을 맺게 될 수도 있지만 결코 무상한 것은 아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무상하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의미다. 집요한 병마로 엄청난 고통과 몇 번에 걸친 대수술을 받으면서도 끝내 회복한 사람들은 살아남고자 하는 육체의 힘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지니게 된다. 생명은 참으로 신비롭다. 

 

살아남고자 하는 놀라운 힘은 때로는 의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생명의 신비다. 

생에 대한 의지는 죽는 순간까지 줄어듦 없이 지속적으로 신비롭게 작용한다. 살아남는다는 것, 즉 생명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의학기술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내재한 놀라운 힘에 달려 있다.

 

화는 삶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려는 마음이 보내는 어떤 신호다. 화가 난다는 것은 삶의 갖가지 일들에 대한 반응이며 강한 느낌의 표출이다. 사람이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 중의 하나인 화는 분명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환자들을 상담하는 경험을 통해 화에도 건강한 측면, 긍정적인 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많은 환자들은 자신의 병에 대해 화를 낸다. 아마도 화는 자신의 몸과 삶을 바꾸어 놓은 병에 대한 나름대로의 거부의사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화는 변화하고자 하는 삶의 욕구이며 어떤 일이 다르게 바뀌기를 원하는 열망이기도 하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화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는 첫 번째 표현일 수 있다. 화가 단지 분노의 표출 그 단계에서 머물고 만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건강을 위한 좋은 신호가 될 수도 있다.

 

고통은 때로는 화로, 때로는 비난이나 자기 연민으로 나타나지만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온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타인을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과정이 되리라.

 

고통이나 괴로움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더 상처받게 만들며 도움을 청했다면 겪지 않아도 될 다른 고통까지도 동반한다.

고통이나 슬픔, 병이나 약함 등은 절대로 혼자만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이 아니다. 고통이나 약함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고 할 때 외로움은 더 깊어진다. 고통을 겪거나 아프거나 힘들 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 있는 행동이다.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들과, 어떤 사람은 비교적 적은 사람들과 사랑하면서 살아가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고 적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살아가는 데 사랑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름표는 우리의 '인생'이 쓰고 있는 하나의 가면이다. 이름표는 어떤 대상의 표시나 구분을 위한 것이므로 자칫 우리의 참 모습을 가면 속에 감추어 버리기도 한다. 

 우리의 삶에 언제나 따라다니는 이름표는 타인을 대할 때 어느 한 면만을 고집하게 만든다. 그러한 이름표는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마음에 선입견을 가지게 하여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시야를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듯 이름표가 주는 선입견은 새롭고 경이로운 어떤 것들도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게 될 때, 그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조건 없이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에게 붙여진 여러 종류의 이름표에 대한 기대치와 관계를 맺는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우리의 마음을 어둠의 구덩이에 빠뜨리기도 하고 빛의 자유를 누리게 하기도 한다.

사람과 사물에 붙인 '이름표'에 대해-설령 그것이 그 분야의 전문가 말일지라도-우리가 너무 구속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생에 마침표는 없다. 죽음도 인생의 끝이 아니다. 인생은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의 연속이며 오묘한 신비다. 인생은 오직 변화와 미지의 세계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은 자에게만 조금씩 그 신비의 문을 열어보이는 모험 가득 찬 길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현재의 자신의 삶 또한 사랑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삶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사는 동안 겪게 되는 많은 체험 중에는 인정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 부정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 부정하고픈 체험 속에 실로 엄청난 보석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통은 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마음은 서로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는 깊은 만남을 어렵게 한다. 살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변화와 위험과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진실을 갈망하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도 하고, 우리가 지닌 진정한 힘을 느끼지도 못하게 한다. 또한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믿지 못하게 만든다.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을, 힘들고 어려운 것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본능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본능이 언제나 현명한 판단을 해주지는 않는다. 어느 한 면만을 선호하는 편견은 삶이 주는 많은 선물들을 잃어버리게 한다. 오히려 편안함보다 어려움을 선택했을 때, 은혜로움과 신비로움 그리고 모험 가득 찬 인생 여정을 경험하게 된다. 진정한 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잘못된 고정 관념들을 과감히 버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살면서 겪게 되는 무수한 어려움들은 우리가 정서적, 영적인 내적 일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며 고통은 내적인 일치의 길을 제시해 주기도 하고 많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잠재적인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

 

스트레스는 단순히 외적인 강박관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적인 일치와 그것이 삶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해하기 힘들만큼 큰 시련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 시련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거나 알기 두려워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신호일 수 있다. 시련은 내적 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하고 소홀했던 대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한다. 우리가 소홀히 했던 바로 그것이-설령 삶을 창조적으로 흐르도록 이끄는 강물을 가로막는다고 생각되는 부정하고 싶은 경험일지라도-우리를 일깨우는 중요한 부분이다.

 

부정했던 삶의 체험들을 되돌아보고 거기에 숨겨진 보석을 찾지 못한다면, 진정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도 없고 내면의 상처도 치유받지 못할 것이다. 

 

객관성이 최선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모든 것을 인식한다면 누구도 자신의 내적 힘을 끌어낼 수 없다. 울 수도, 위로 받을 수도, 의미를 찾거나 기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객관성을 최선으로 보는 사람은 자기 앞에 펼쳐지는 삶의 파노라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진정한 배움은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보다는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얻는다. 의식을 잃고 죽음 가까이 갔다가 깨어난 사람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신비한 통찰력을 얻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삶의 근원적인 가르침에 대한 통찰력이다. 

 우리의 공통된 목적은 우리 안의 지혜가 커져서 사랑하는 법을 보다 잘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무엇을 얻어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잃음으로써 배우기도 한다. 성공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게 된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삶이 가르쳐 주는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용감하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영웅이란 두려움 가득한 인생의 터널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해야 할 일을 하며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 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전문가들과 권위 있는 사람들 - 의사나 교육자, 정치가, 기술자, 랍비나 사제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으며 기대하고 존경한다. 물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귀 기울여서 들어야 할 목소리는 우리 마음 안에 있고 지금은 그 내면에 존재한 은총의 장소를 발견해야 할 때다. 

 

누구든지 무엇을 잃어버리는 상실의 체험을 경험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상실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다. 내가 그랬듯이 상실에 대한 태도는 주로 가족에게서 배운다. 상실의 의미는 삶에서 아주 중요하다. 상실의 아픔을 체험할 때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지혜가 필요하지만 우린 상실에 대해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면 오히려 그 소유물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 배웠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시선을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마음의 눈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에 의해 자신의 고유성을 알게 되고 자신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된다. 

 

인생은 여러 조각들이 모여서 완성되는 하나의 그림 조각 맞추기 게임과 같다. 그림 조각 중에 어둡고 밝지 않는 색깔이나 예쁘지 않은 모양의 조각이라고 해서 그것을 빼버린다면 절대 그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완성된 그림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고 그림 조각 맞추기 놀이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고통이나 슬픔이라는 삶의 조각을 가지고 그들의 아름다운 삶의 그림을 완성시키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 삶의 조각들은 전체 인생이라는 그림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그 조각들이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아름다움은 삶의 조각들을 - 그것이 비록 어둡고 칙칙한 색깔이라고 하더라도- 부정하는 사람들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고통이나 슬픔이라는 삶의 조각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종의 커다란 힘이다. 고통이나 슬픔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지혜를 배우면서 우리의 삶을 완성시켜 나가야 하리라.

 

인생을 살면서 낡은 방식을 버리고 자유롭게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타일이나 자기 기대나 남들의 시선에 매이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비록 한 번에 서너 계단씩밖에 오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참 은총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새로운 발견이나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그 순간에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과 진정으로 가까워지기를 원한다면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상대방이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할 것 같지만 사실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과 마음으로 가까워지고 친밀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불완전한 모습이나 약점을 보여줄 때다. 때로는 우리의 약한 모습인 병이나 또 다른 고통을 통해 더 깊은 인간 관계가 이루어진다. 

 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크나큰 은총 안에서 이루어진다. 은총이 없이는 자신의 결점까지도 상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의 특권이다.

 

경험 그 자체보다 그 경험이 주는 잘못된 생각이 우리를 어둠의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러나 어둠이 아무리 깊이 자리하고 있을지라도 은총의 빛 앞에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어둠은 사라진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은 없다. 

 

치유에는 어떤 기준이나 경계선도 없다. 은총은 소리 없이 다가온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면서 치유가 일어난다.

 

신은 우리가 가는 길에 금이 든 자루를 떨어뜨려 놓곤 한다. 하지만 그 금 자루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은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그들이 겪는 엄청난 고통의 체험을 통해 타인과 자신은 깊이 연관되어 있고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아는 감각이 생겨난다. 그런 감각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진정 어린 이해를 하게 되면서 서서히 내적인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음은 사랑의 감정을 뛰어 넘어 진정한 삶을 체험하는 길이며, 사람과 사람을 서로 깊이 연결하여 서로 깊은 일치감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통로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단순한 느낌보다도 더 심오한 차원이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상처까지도 치유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다. 이런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하는 연대감으로 인해 보다 쉽게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에 대해 연민을 지니고 서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들이 겪는 고통과 기쁨 안에서 인간은 서로서로가 뗄 수 없는 깊은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는 바뀌게 되고 우리는 더 이상 외로움 속에 혼자 머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떤 일이 갖는 개인적인 의미를 깨닫는다면 일이나 인간관계나 심지어는 삶 자체의 체험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매일 어려운 일을 하거나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인 문제다. 의미야말로 진정한 힘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보다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단순히 성취감 이상의 어떤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내면의 기쁨을 누리며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함께 사는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마주치는 현실이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그냥 우연히 만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시작 없는 끝이 있을 수 없고 또한 끝은 모든 것의 종착지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시작과 끝은 항상 서로 마주보고 있다. 어떤 것을 잃는다는 것은 그것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서 새로운 것을 얻게 된다. 

 

어떤 때에는 육체적 치유보다 영적인 치유가 더 필요할 수도 있다. 병을 치유한다는 것은 병이 난 부분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영육에 관한 일이다. 병이 난 사람의 병이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육체적 치료만이 아니라 영혼의 상처에 대한 영적이 치유가 일어난다. 영적인 치유가 가능할 때에 우리의 영혼은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물론 죽음을 통해 영원한 해방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 속에서도 영적인 치유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대화의 단절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잃게도 하고 과거에 대해서도 소홀하게 하여 소중한 무엇인가를 놓쳐버리게도 한다. 

 

매일 매일 일상의 수행이 결국 우리 인간됨의 특성을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커다란 영적인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특별한 체험을 통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돌보거나,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우정을 나누거나, 병을 앓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하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체험들을 통해 일어난다. 

 

세상이 거룩하고 일상의 평범하고 작은 일들 안에 신성함이 담겨있다는 깨달음은 생명을 위협하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가까운 친구들, 가족들, 때로는 그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에게도 이들을 통해 문득 찾아온다. 이것은 오히려 환자들이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하나의 길이다. 비록 때가 되어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그들이 세상에 남겨 놓는 위대한 유산이 된다. 

 

어떤 결정을 하는 그 자체보다도 결정을 하기까지의 과정이나 결정을 하고난 뒤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삶에서도 집착은 바른 선택의 기회를 가로막는 반면에 투신은 진정한 삶의 선택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점점 진실한 삶에 투신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부차적인 것들에 집착하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투신과 집착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집착은 벗어날 수 없는 덫으로 우리를 몰아가지만 투신은(때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우리를 더 큰 장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이 둘은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받아들일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의 선택의 길에 선 우리를 시험한다.

 

이 둘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우리를 점점 자유롭게 할 것인지 구속할 것인지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집착과 투신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집착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선함을 반영하지 못하는 단순히 본능적인 반응이다. 반면에 투신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면서 삶에 대한 의지와 결부된 우리의 지속적인 선택이다. 

 

잃어버린 사람과 사물에 너무 집착을 하게 되면 장님처럼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라는 뒤만 돌아볼 뿐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에만 매달린다면 삶이 부르는 손짓을 볼 수도 없고 그곳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우리가 삶을 억압하려고 하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잊지 않고 기억하되 떠나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떠나보낼 수 있다면 또 다른 방식으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자유롭다. 그 자유는 슬퍼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택하는 것이다. 

그대여, 삶을 택하라!

 

기존의 삶의 틀을 깰 필요가 있다. 그 틀이 깨어질 때 진정 우리는 자유로운 새로운 눈을 뜨게 되리라. 

 

은총은 신비롭게 찾아온다. 하지만 그런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조용히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조용히 머무르는 그 시간 또한 은총이다. 

 

기도는 무엇인가를 얻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버리는 일이다. 기도는 욕심으로 생기는 괴로움을 이겨내도록 도와주며,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마저도 내맡길 수 있게 해준다. 기도는 자연의 순리와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며 단순히 지적인 차원이 아니라 심오한 경험을 통해서 세상과 삶을 이해하도록 이끌어 준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세상이나 어떤 상황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변화되는 것은 오히려 바로 자신이다. 기도를 통해서 개인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는 전체적이고 포괄적으로 변화되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다. 

 

깊은 차원에서 기도는 우리의 삶과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기도를 향해 손을 내민다는 것은 내가 지닌 오만과 남의 도움을 거부하는 자존심과 독선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삶을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삶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 기도는 겸손을 배우고 은총을 체험하는 기회다.

 

때로는 단순한 기도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기도는 삶을 통제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 신비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준다.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힘이 바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안내자이며 늘 살펴보아야 할 삶의 나침반이다.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과 연결된 그 힘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중력의 영향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엄청난 것처럼 그렇게 굉장히 크고 깊다.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고 알아내는 능력은 무엇보다도 인생이 지니고 있는 역설을 이해하고 모순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을 어떻게 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생의 신비로움을 감지할 수 있다면 인생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 택일의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더불어 저것'이라는 양자가 공존하는 의미다. 

 

화두를 풀기 위해서는 신비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때가 되면 화두에 대한 답을 얻게 되리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깊은 내면으로 고요히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기대했던 대로 화두가 풀리지 않기 때문에 좌절하지만, 다시 조용히 귀 기울이고 비록 금방 이해되지 않지만 포용하려는 열려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해답과 해답을 찾고자 하는 이가 서로를 향해 열린 마음이 되면 해답은 슬며시 신비의 문을 연다. 화두의 열쇠는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화두를 푸는 내내 살며시 얼굴을 내밀어 주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일단 화두를 풀게 되면 그렇게 쉬운 것을 미처 몰랐다는 것이 믿기 어려워진다. 새로운 시각으로 화두를 풀게 되면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마음이 된다. 묵은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 

 

인생이 우리 앞에 내어놓는 많은 문제들은 마치 선사들이 제자들에게 던지는 화두와 같다. 그러나 화두의 묘책이 어느 순간에 떠오르듯 삶이 담고 있는 의미와 지혜도 불현듯 나타난다. 삶의 의미를 기다리는 것은 마치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처럼 신비롭다. 한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 삶의 의미를 잉태하게 된다. 때로는 그 임신의 기간이 몇 주에 불과할 때도 있지만 몇 년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하나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어 간직하면 더 많은 의미를 잉태하게 된다. 그 의미들은 전에 잉태했던 것보다 더 깊고 넓어진다. 

 

분명히 살면서 겪는 고통이나 병은 인생의 화두다. 사실은 삶 자체가 화두다. 삶에서 마주치는 고통이나 병을 마치 선의 제자들이 선사가 던진 화두를 받아들이듯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도 고통을 함께 나누며 영적인 여정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만남 안에서 육신의 치유가 일어나고 사랑 가득한 영혼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태초부터 사람들은 서로를 치유해 왔다. 외과 의사나 내과 의사나 암 전문 의사나 심리학자 등이 있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서로를 위해 치유의 역할을 담당했다. 상처 받고 있는 것에서 치유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치유의 힘을 인식하고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를 끌어안아 주는 힘이라든가, 용서해 주는 축복이라든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데서 오는 놀라운 은총이라든가, 자기 안에 생각하지 않았던 선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등의 가장 단순한 인간관계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치유의 힘이 담겨 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고통을 겪지만 고통의 체험과 상처로부터 얻은 지혜로 그 고통을 치유하기도 한다. 내면에 존재하는 치유의 힘을 기억하고 신뢰하는 것이 치료전문가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전문성이 상처의 치료에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좋은 치유를 얻는다. 상처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진정 그 상처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의 치유는 전문성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연민의 마음이다.  

 

정말 필요한 것은 그저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가만히 들어 주는 것은 가장 오래된 강력한 치유의 도구다.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 잘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이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은 그 사람에서 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는 주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의 말을 온 마음으로 들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내면의 어떤 방황이 쉬면서 치유를 받을 수 있게 거룩한 장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방황이란 거부되었거나, 사랑받지 못했거나, 자타에게 무시되고 인정받지 못했던 내면의 감추어져 있던 상처를 말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영혼과 마음이 자주 집을 잃고 방황한다. 들어준다는 것은 거룩한 침묵을 낳는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관대하게 귀 기울이면 자신이 지닌 진실의 소리도 듣게 될 것이다. 어쩌면 처음으로 그 진실의 소리를 듣는 것일 수도 있다. 침묵 안에서 귀 기울여 듣다 보면 그 사람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에게 속삭이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도 듣게 된다. 

 

생명이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삭막해 보이는 장소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준다는 것은 마치 황무지에 내리는 빗줄기 같은 것이 아닐까... 내린 비에 황무지는 다시 생명이 자랄 것이고, 어떤 이는 잃어버린 무엇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믿기 힘든 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을 닫기보다 마음을 열어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그 신비의 경이로움 앞에 가만히 손을 모으게 될 것이다. 삶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큰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모든 인간의 삶은 궁극적으로 영혼을 향한 여정일 것이다. 우리 삶에서 죽음은 삶의 경험들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마무리하는 여정의 마지막 지점이다. 

 

어쩌면 지혜란 기다림에 달려 있고, 치유란 시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한 번 일어났던 좋은 추억은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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