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예전에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린 기억이 있는데 아마 어려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번 소설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인내력을 시험하며 읽어나갔네요. 그러나 이번에는 첫 순서에 실려있는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비롯해서 소설집 전체에 마음을 끄는 문장들이 많이 발견되어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완독 후에 그의 문장들을 필사하면서 처음 읽을 때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을 머물며 여러 번 읽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뭐라 딱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생각을 요하는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소설집에 실린 해설을 읽으면서 같은 책을 읽은 두 사람의 리뷰가 천양지차임을 절감하며 조금은 우울해지고 낙담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나의 글 읽기는 언제쯤 제대로 된 글 쓰기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지, 그런 시간이 오기는 할지 불확실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으며 저만의 소박한 리뷰를 적어갈 생각입니다. 제게도 세컨드 윈드가 불어오는 그런 날이 오리라 믿어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건 지민씨의지민 씨의 엄마가 소설에 쓴 말이에요. 소설 속 연인은 두 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시간이 없으니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어요. 오직 이 순간의 현재만 존재하죠. 그럼에도 인간은 지나온 시간에만 의미를 두고 과거에서 현재의 원인을 찾습니다. 시간이 20세기에서 21세기로 흐르든, 19세기로 흐르든 마찬가지예요. 안타까운 건 이런 멋진 소설을 쓰고서도 지민 씨의 엄마가 이십 년 뒤의 지민 씨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가장 괴로운 순간에 대학생이 된 딸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선택은 달라졌을 겁니다.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미래를 기억해, 엄마를 불행에 빠뜨린 아버지와 그 가족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게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와닿지 않았지만 이 문단을 여러 번 읽고나니 어렴풋하게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미래를 기억하다는 건 아마도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것일 테고, 이것이 현재의 삶에서 내리게 될 수많은 결정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민의 어머니가 기억하지 못한 미래를 지민은 기억해 냈고, 그 덕분에 현재 남편과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거겠죠.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계속 지기만하는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버텨낼 수 있으며, 또 그다지 달라질 것 없는 평범한 미래를 다시 선택하게 될까요? 글쎄요... 언젠가는 백기투항하게 되는 순간이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얼마간은 '오늘 하루만 살아내자!'라는 생각으로 버텨보려고 노력할 것 같습니다.
얻어맞고 쓰러져봐야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지. 인생 별거 아니다. 버틸 때까지 버텨보다가 넘어지면 그만이야. 지금은 그거 연습하는 중이야.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세컨드 윈드’라고 하더라고요
'세컨드 윈드'라는 단어 안에서 희망의 단서를 얼핏 본 거 같습니다. 버티고 넘어지고 쓰러지면 끝나는 것이 우리 삶이라 생각했는데, 쓰러진 그 자리에 불어올 한줄기 바람을 알게 되었으니 무릎을 잡고서라도 한번 더 일어나서 한걸음 내디뎌봐야겠네요..
지훈은 이제 서른다섯 살이 됐다. 서른다섯 살이란, 앉아 있던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방이 툭 트인 들판에 적막하고 고요하고 쓸쓸하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와 같은 삶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라고.
지훈은 별다른 뜻 없이 기사가 게재된 웹사이트 검색창에 ‘사랑해’라고 입력해 보았다. 문득 사람들은 언제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지 궁금해져서였다. 곧 그 말이 포함된 기사들이 검색됐다. 지훈은 그 목록의 의미를 금방 깨달았다.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테 죠. 그 기억을 되살려 다시 가슴에 품을 때 우린 빈 나무가 아니라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합니다. 아주 희미한 단서라도 좋으니 사랑했던 기억을 꼭 되살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후 사십여 년에 걸친 공부를 통해 이성으로 신의 존재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네. 그래서 나는 신을 직접 체험한 신비주의자들, 예컨대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에 관한 책을 읽었지.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됐네. 지금 이 순간, 신은 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그치면 바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을 읽고 있는 느낌을 주는 문단입니다. '생각이 그친다'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흔히 '멍 때리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순간일까요? 공부가 너무 짧아서 글 속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음이 답답하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시선을 끄는 문장이라 기록해 보았습니다.
"이토록" 미스터리 한 소설이라니...
소설을 빙자한 철학서, 저는 이 책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육체의 삶과 정신의 삶, 신과 인간 등등의 광범위한 주제들을 8편의 단편에 빼곡하게 채워 넣은 작가의 역량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소설 속의 문장들에 친근해지면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에도 한걸음 가까워질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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