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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by 최은영

by beactive71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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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함께 성장해나가는 우리 세대의 소설가’를 갖는 드문 경험을 선사하며 동료 작가와 평론가, 독자 모두에게 특별한 이름으로 자리매김한 최은영의 세번째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출간되었다. 올해로 데뷔 10년을 맞이하는 최은영은 그간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는 인물의 내밀하고 미세한 감정을 투명하게 비추며 우리의 사적인 관계 맺기가 어떻게 사회적인 맥락을 얻는지를 고찰하고(『쇼코의 미소』, 2016), 지난 시절을 끈질기게 떠올리는 인물을 통해 기억을 마주하는 일이 어떻게 재생과 회복의 과정이 될 수 있는지를 살피며(『내게 무해한 사람』, 2018), 4대에 걸친 인물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감으로써 과거에서 현재를 향해 쓰이는 종적인 연대기(年代記)가 어떻게 인물들을 수평적 관계에 위치시키며 횡적인 연대기(連帶記)로 나아가는지를 그려왔다(『밝은 밤』, 2021). 이전 작품들에 담긴 문제의식을 한층 더 깊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어나가는 이번 소설집은 작가가 처음 작품활동을 시작했을 때 품은 마음이 지금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여줌으로써 “깊어지는 것과 넓어지는 것이 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는 것”(한국일보문학상 심사평)을 감동적으로 증명해낸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담긴 7편의 중단편은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하다가도 어느 순간 이야기의 부피를 키우면서 우리를 뜨거운 열기 한가운데로 이끄는 몰입력과 호소력이 돋보인다. “너라면 어땠을 것 같아. 네가 나였다면 그 순간 어떻게 했을 것 같니”(「답신」, 170쪽)라고 묻는 최은영의 소설은 소설 바깥의 우리를 적극적으로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때로는 직장생활을 하다 다시 대학에 입학한 인물이 충만한 기쁨과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느끼는 강의실로(「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때로는 동갑내기 인턴과 함께 카풀을 하면서 그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대화를 하게 되는 자동차 안으로(「일 년」), 때로는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여온 인물의 외로운 옆자리로(「이모에게」) 우리를 데려가 그들과 함께 한 시절을 겪어내게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마음이, 당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붙을 수 있다는 것”(「몫」, 66쪽)을 일러준다. 그것이 최은영의 이번 소설집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힘이자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힘인 다른 사람에 대한 상상력일 것이다.
저자
최은영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3.08.07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by 최은영

 

믿고 읽게 되는 최은영의 단편소설집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읽고 꽤 시간이 지난 듯하다. 신간이 나온지도 모르고 책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름 최은영! 단편소설을 선호하지 않던 내게 그녀의 첫 단편집 《쇼코의 미소》는 섬세한 심리묘사와 담백한 언어 등 마음을 끄는 요소들이 많았다. 그 이후에 출간된 《내게 무해한 사람》, 장편소설 《밝은 밤》까지 다 찾아 읽을 정도로 그녀는 요즘 나의 최애 소설가로 자리했다.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로 나를 매료시킬까라는 생각으로 망설임 없이 책을 구매하고 읽어 나갔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한 이야기들 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고 사유의 시간을 준 작품이었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쪽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 나 또한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 《 쇼코의 미소 》 

 

차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일 년

답신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대학의 시간 강사와 비정규직 은행원이었던 29세 늦깎이 학사 편입생 희원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각자 용산에서 보낸 과거에 대한 기억을 가진 두 사람이 글쓰기 강의를 통해 만나고, 강의실과 지하철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하는 희원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다. 학생들이 쓴 에세이를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운영하는 강사를 동경하고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움을 느끼던 희원은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대학강사가 된다. 한 겨울 퇴근 길에 공중에서 흩어지는 숨결 속에서 불현듯 떠오른 그 강사가 지금 자신이 가는 길을 밝혀주는 희미한 빛이길 소망했지만, 그 빛을 잃고 확신 없이 나아가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독백으로 끝이 난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하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가 잔인함을 잔인함이라고 말하고, 저항을 저항이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 내 마음도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날것 그대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덜 외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그러지 않았던 내 비겁함을 동시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희원이 수업 시간에 발표한 에세이 '통근'에 대해 여러 학생들이 갑론을박하는 장면에 나오는 단락이다. 희원이 느꼈던 감정이 내게도 낯설지 않다. 날것 그대로 말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고, 살아오면서 내게 그런 순간이 과연 몇 번이나 됐는지 돌아보게하는 순간이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 속에서는 주위 사람들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거침 없이 나를 표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글쓰기에 대한 정의는 제각각이다. 작가 최은영은 글쓰기를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동안 그녀의 작품을 읽으면서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을 가진 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한참 빗나간 느낌이다. 현실에 기반하여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찰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늘 비판하고 질문을 던지는 작가 최은영을 만난 시간이어서 기뻤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녀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경험을 했다.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나는 아직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아직 다다르지 않았나.


희원이 대학강사가 되어 예전의 에세이 강사를 떠올리며 더 이상 작가나 번역가로 만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 위에서 희미한 빛으로라도 존재해주길 바랐던 그녀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불안하고 자신 없는 현재를 돌아보는 희원의 외로움과 막막함이 느껴진다.

 

어느 대학의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던 정윤, 희영, 해진의 이야기를 해진의 관점에서 서술한 글이다. 교지에 실린 선배 정윤의 글에 매혹되어 여러 번 읽었고, 그녀의 글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정윤의 글을 읽은 당신은 그 글을 읽기 전의 당신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은 과연 어떤 글일까 궁금해진다. 아직 그런 글을 만나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과연 글이 그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해진의 독백은 곧 작가 최은영이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표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글이 목표에 다다랐는지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여 수많은 독자와 이어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희영은 자신이 독서를 하며 느낀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글을 썼다.
고작 한 장짜리 발제문인데도 희영의 글은 날카롭고 유려했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개성이 있었다.
그때의 당신은 차마 질투조차 못한 채로,
영원히 희영과 같은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을 느꼈다.

 해진은 희영과 나란히 편집부원이 되었고, 희영과 함께 작업하면서 해진은 희영의 글에 감탄을 넘어 절망감을 느낀다고 쓰고 있다. 동료의 뛰어난 능력을 직시하며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지점에 닿을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의 절망감을 토로하는 해진의 모습에 공감한다.

 

희영에게는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지력이 있었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관찰력과 용기, 지력, 공감, 직관을 모두 지닌 희영은 결국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과 작별하게 된다. 해진의 말처럼 희영의 뛰어난 재능이 그녀의 삶에 해가 된 것일까라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탁월한 재능일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삶을 방해하는 치명적인 요인이 되어 결국은 세상을 등지게 되는 사례를 종종 만나게 된다.

 

희영의 재능을 일찌감치 인지했으면서도 해진은 한번도 희영을 인정해준 적이 없음을 뒤늦게야 아프게 후회한다. 글을 쓸 자격도, 재주도 없다는 괴로움이 희영에게 자리하고 있음을 그때의 해진은 알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해진이 희영을 인정하고 칭찬해주었다면 그녀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까? 

 

그때 당신은 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어서 쓰는 마음,
마음을 다해서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불처럼 당신 몸을 휘감고 아프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늘 글쓰기에 부족함을 느끼던 해진은 아내 폭력 문제를 다룬 주제 선정 회의에서  왜 여성 문제에 대해 글을 써야하는지 설득하면서 몸이 뜨거워지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마음을 다해서 글을 쓰고 싶은 뜨거운 열정이 해진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순간이었고, 그동안 포기하지 않고 글을 써온 그녀에게 물개박수를 건네고 싶어졌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해진은 울었다고 고백한다. 글을 씀으로써 누군가와 이어지고, 더 나아가 진심으로 공감하며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신은 울면서 글을 썼다. 
마음이, 당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붙을 수 있다는 것
당신은 그때 알았다.


골똘히 한 생각을 써내려간 글 속에서 당신은 당신 나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그런 순간들이 당신에게 준 경이와 행복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싶었다.
그토록 나약해 보이는 당신 안에서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글로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이는 당신도,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증명하고 싶었다.

 

글쓰기의 뜨거움과 공감의 힘을 체험한 이후 해진은 자신감을 느끼고 성장해간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을 증명해내고 싶어한다. 글쓰기가 한 개인을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보여주는 부분인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해진이가 글쓰기의 지극한 행복을 표현한 문장이다. 한번도 진지하게 글쓰기에 대해 고민해본 적 없는 나이지만 해진의 행복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고, 나 역시 그런 행복을 누리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졸업한 뒤 해진은 기자로, 희영은 미군기지 여성들을 위한 기지촌 활동가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런 두 사람이 희영의 소박한 숙소에서 만나게 되고, 해진은 희영에게 글쓰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희영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희영은 글쓰기가 아닌 삶을 선택했다. 정의로움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차별받는 약자들과 함께하며 일상의 소소한 행위를 공유하는 삶을 더 가치롭다고 여긴다. 최은영 작가의 딜레마가 드러난 단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업작가로서의 삶과 약자의 현실 속에 뛰어들어 공존하는 삶! 무엇이 정답인지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희영처럼 자신에게 더 가치있다고 판단되는 삶을 선택해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몫이리라. 

 

일 년

정규직 3년차인 지수와 1년 계약직 인턴 다희가 함께했던 1년 동안의 이야기인데, 최은영 작가의 전매 특허인 세심한 심리 묘사가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지식을 과시하는 표현은 1도 없이 쉽고 간결한 문장들이 시선과 마음을 붙잡아두고 감탄하게 한다. 카풀로 간척지 공사 현장을 오가며 지수는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다희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회사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경험한 지수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매사에 눈치를 보고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스스로를 질책하고 과도하게 몰아세우던 지수는 솔직하지만 자신을 낮추지 않는 다희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에게 경계를 허물어준 다희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녀의 마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르는 지수다. 그런 지수가 처음으로 다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난 뒤의 마음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날 차 안에서 다희에게 한 이야기들은 오래도록 밖으로 나가기를 바랐던 것처럼
그녀 안에서 아우성치며 그녀를 밀어붙였다.
이미 정리한 시간이기에 그녀는 정제된 언어로 이야기했지만, 몸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땀이 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머리가 아팠고, 때로는 그때처럼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마음 속에 꾹꾹 눌러두기만 했던 지수의 외로운 처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수가 마음문을 닫은 채 자신의 감정을 혼자 삭이는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런 지수에게 다희와의 대화는 진정한 관계의 시작점이었는데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

다희와 얘기할 대면 따뜻한 바닷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물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희와 만나고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해온 대화가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독백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말이 타자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어떠한 거슬림도 없이 완벽하게 스며드는 대화에서 느껴지던 안온함을 기억한다. 할머니와의 이별 이후에 그런 대화에 목말랐던 지수가 좀더 적극적으로 다희에게 다가갔더라면 지수는 외롭지 않았을 거다.  때론 인간관계에도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상대에게 매달릴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음을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살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사라지기보다는 그저 체념하는 게 아닐까? 주체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이 '살아지는' 인생의 순간들을 경험했고 앞으로 또 그런 순간이 오리라 생각한다. 온통 늪이고 가시밭길 같은 인생이라고 여겨지는 삶이지만 무 자르듯 단칼에 베어낼 수 없는 것 또한 삶이기에 나는,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굳어진 얼굴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온전히 나 혼자였다면 불가능한 버팀이었을 것이다. 함께 걱정해주고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음을 지수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답신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고모할머니 손에 키워진 두 자매는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한다. 동생에게 언니는 마음을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언니가 고등학생 때 같은 학교 교사에 의해 짓밟히고 임신까지 하게 되고 결국은 결혼하여 학대 당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고 상처입는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언니는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지 못한 채 남편에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끝내는 자신을 때리는 그를 말리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동생에게 법정에서 불리한 증언을 하게 되고 동생은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조카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빌어 자신과 언니의 어긋남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는 이 소설을 읽으며 너무 마음 아프고 슬펐다. 동생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 왜 저항하지 못했을까. 그때 동생과 힘을 합쳐서 남편에게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삶을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은 물론이고 동생에게조차 치명적인 상처를 주면서까지 지켜내야했던 언니에게 정신 차리고 너 자신을 바라보고 너를 사랑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에게 버림받았던 삶이 자신의 딸에게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버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짐작은 되지만, 엄마가 불행하면 자녀도 결코 행복하게 성장할 수 없음을 그녀는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언니를 잃게 된 동생은 두 팔 벌려 달려와 자신의 다리에 매달리던 두 살 조카에게만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보일 수 있고, 그렇게 표현된 마음조차 조카에게 닿을 수 없어 편지지 안에 갇힌다. 그러나 전하지 않아도 그 마음은 실제로 전해진다고 동생은 믿으며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썼다가 결국 찢어버릴 편지에 조카에 대한 무한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이제 영원히 타인으로 지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쓸쓸하게 받아들이는 마지막 장면이 슬프다.

교도소에서 노트에 써내려간 글은 남겨두는 글과 찢어버리는 글로 나뉘었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나를 수습할 수 없을 때 

나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노트에 적은 후에 바로 찢어서 없애버렸어.
하지만 어떤 글을 남기기로 선택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바람을 담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마음은 실제로 전해지지. 상대가 그 글을 읽든, 읽지 않든 말이야. 

 

「파종」

민주는 이혼 후 어린 딸 소리와 함께 오빠집에 머물며 알뜰한 보살핌을 받는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겉돌던 어린 자신에게 엄마를 대신해 오빠는 민주를  정성으로 돌봐준다.  자신에게 행해지는 언어 폭력과 오빠 민혁에게 되풀이되던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도주하는 마음에서 성급하게 선택한 민주의 결혼은 결국 파행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민혁 덕분에 소리와 함께 시골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오빠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셋이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은 단절되고 소리의 기억 속에 유폐된다. 학교에서 개최된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은 소리의 글을 통해 소환된 텃밭 가꾸기에 얽힌 추억이 모녀를 새로운 출발선으로 데려다 놓는다. 삼촌과 함께했던 시간을 따뜻하고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소리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자신의 언어로 그 순간들을 복원해냈지만, 민주는 반대로 그 시간들을 외면했다. 

 

소리는 힘이 들고 지칠 때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고 적었다.
삼촌과 그 작은 밭에서 작물을 키우고 수확했을 때 느꼈던 재미, 함께 주고받았던 말들, 흙과 풀 냄새......
하지만 그런 기억이 하루하루 옅어지고 흩어져 이제는 삼촌의 목소리조차 떠올릴 수 없다고 썼다.
애써서 삼촌의 목소리를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슬펐다고.
소리는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글을 써서 남겨놓아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고 쓰기도 했다.


행복한 기억도, 아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옅어지고 그중 일부는 휘발된다. 어떤 식으로든 기억되어야 할 우리 삶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잡아둘 수 있는 도구는 글쓰기가 유일하다. 나에게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나 떠올려본다. 윤곽만 남은 채 대부분이 희미해졌고, 그때의 감정도 빛이 바랬다. 앞으로 다가올 날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남은 삶은 최대한 세세하게, 그리고 자주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민주도 힘들겠지만 오빠와 함께했던 시간을 회상하면서 글로 옮겨보면 어떨까. 아프고 슬픈 기억과 행복한 기억이 시소를 타면서 어느 시점에는 평형을 이루며 민주를 안정시키는 순간이 올 거라 믿는다. 

「이모에게」

엄마를 대신해 희진을 키워준 이모와의 시간을 회상하는 작품이다. 어린 자신에게 엄격했고, 싫어하는 것이 많았던 이모는 희진에게 강한 여자가 되기를 바란다. 눈물 많고 여렸던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우습게 여겨지지 않도록 혼자 방에서 울라고 말하던 이모의 양육방식은 감정적 방임에 가까웠다고 회상한다. 불평이 많고 부정적이고 인색했던 이모의 모습을 싫어했지만 어른으로 성장한 자신의 얼굴은 어느새 이모와 닮아 완고해졌다. 6번의 유산을 겪고 나서 살기 위해 가정을 포기한 이모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에 철갑을 두르게 되고, 그런 이모에 의해 양육된 희진도 감정 표현에 인색한 어른이되어 버렸다. 비 오는 날 집으로 찾아든 개 군밤이에게 더 없이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군밤이가 죽었을 때 희진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던 이모는 79세에 뇌졸중을 앓고 난 이후에는 감정 표현이 자유로워져서 웃기도 하고, 거친 모습이 되기도 하고, 갓난 아기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감정의 장벽이 사라져 이제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모의 전철을 밟고 있는 희진은 자신이 좋아하던 동료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한밤중에 전소한 헛간'처럼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린다. 순간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때로는 절제하기도 하고, 막힌 분노나 억을함을 속 시원하게 배출함으로써 타인의 공감이나 위로를 얻고, 더러는 비난과 멸시를 받는 편이 삶이 아닐까 싶다. 제대 후 민간항공사에 취업하여 비행의 자유를 누리는 희진이가 자신의 감정의 브레이크에서도 자유로워지기를 응원하는 마음이다.

방화문을 닫듯이 마음을 닫아버리면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의 불길로부터 안전했다. 
하지만 그해 봄에는 그 문이 더는 내 힘으로 닫히지 않았다. 
슬프다거나 괴롭다는 감정보다도 내 마음 하나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먼저 일었다.

마침내 내가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은 한밤중에 전소한 헛간처럼 무너져내렸다.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나는 그렇게 믿었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엄마 기남이 둘째딸 우경의 홍콩 집에 초대받아 간 며칠 동안의 소회를 적은 글이다. 일반적으로 친밀한 관계일 거라고 인정되는 모녀 사이는 우경이 성인이 되면서 소원해졌는데, 정작 엄마인 기남은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딸의 눈치를 살피며 속앓이를 한다.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집에 맡겨져 어린 시절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던 기남이기에 모녀간의 냉담한 현실이 화상보다 더 쓰리고 아팠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우경이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언니 진경, 그리고 엄마에게서 멀어진 이유는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우경은 언제나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경이 자신을 홍콩으로 초대했을 때 기남은 반가움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들떠서 같이 탁구 치는 사람들에게도 딸네 집에 간다고 자랑을 했다.
우경과 자신이 퍽 가까운 것처럼 허풍을 쳤다.
딸이 자신에게는 누구보다도 어려운 사람이라는 말을 기남은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기남은 우경 앞에서 실수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일상적인 말을 주고받을 때도 신경이 쓰였다.


어떤 이유로 해서 엄마에게 우경이가 이렇게 멀고 어려운 사람이 되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지만 글을 읽으면서 기남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서글퍼졌다. 기남의 의붓딸 진경은 어린 시절에 엄마에 대한 사랑을 아이답지 않게 표현했었는데 현재의 상황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안사돈에게는 있고 자신에겐 없는 그 무언가 때문에 노력해도 우경과 가까워질 수 없다는 기남에게 진경이라도 따뜻한 눈빛과 마음을 나눠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유지하는 가정들도 많지만 주변에는 그렇지 못한 가정들도 적지 않은 듯 하다. 가족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참 쉽고도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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