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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by beactive71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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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문학성을 두루 입증받은 ‘리얼리스트’ 정지아가 무려 32년 만에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써내는 작품마다 삶의 현존을 정확하게 묘사하며 독자와 평단의 찬사를 받아온 작가는 이번에 역사의 상흔과 가족의 사랑을 엮어낸 대작을 선보임으로써 선 굵은 서사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한모금 청량음료 같은 해갈을 선사한다. 탁월한 언어적 세공으로 “한국소설의 새로운 화법을 제시”(문학평론가 정홍수)하기를 거듭해온 정지아는 한 시대를 풍미한 『빨치산의 딸』(1990) 이래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전직 빨치산’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의 시간만을 현재적 배경으로 다루지만, 장례식장에서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해방 이후 70년 현대사의 질곡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웅장한 스케일과 함께 손을 놓을 수 없는 몰입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은 정지아만이 가능한 서사적 역량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어쩌면 ‘가벼움’에 있다. “아버지가 죽었다. (…) 이런 젠장”으로 시작하는 첫 챕터에서 독자들은 감을 잡겠지만 이 책은 진중한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각 잡고’ 진지한 소설이 아니다. 남도의 구수한 입말로 풀어낸 일화들은 저마다 서글프지만 피식피식 웃기고, “울분이 솟다 말고 ‘긍게 사람이제’ 한마디로 가슴이 따뜻”(추천사, 김미월)해진다.
저자
정지아
출판
창비
출판일
2022.09.02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장례식에 모인 다양한 인물들-친척, 동창생, 빨치산 동지, 베트남 어머니를 둔 소녀-전해 주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이 소설의 내용입니다. 3일이라는 현재의 시간 속에 해방 이후 70년의 복잡다단했던 현대사의 민낯과 소시민들의 굴곡진 인생사가 작가만의 위트와 유머로 세련되게 각색되어 몰입감을 높여 주고 있습니다. 상큼 발랄한 책 표지와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연상되는 제목에서 아주 조금은 이 소설의 분위기를 감지했던 것도 같습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의 대화체 문장을 읽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고, 빨치산 부모님만이 구사할 수 있는 독특한 대화에서 사상과 현실의 딜레마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유시민 작가의 추천으로 대박을 터뜨린 이 소설은 이제 그 자체의 매력으로 더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빨치산의 딸로 태어나 감시와 냉담의 시선에 익숙했을 50대 후반의 작가가 반 자전적인 이 소설을 통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것 같아 다행이고, 소설의 흥행이 고단했던 그녀의 삶에 작은 선물이 됐을 거라 믿어봅니다.

 

아버지와 딸,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작은 아버지에게는 작은 아버지의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딸, 그리고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던 인물들에게는 자기만의 서사가 있었을 테고 그걸 한마디로 요약하는 문장이 아닐까 싶어요.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사정'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어느 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내가 예상하던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는 거겠지요.  그 혼란의 순간에 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건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신념이겠지만, 그마저 배반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이 또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살 때의 아버지는 나에게 나와 같은 존재였다. 일심동체. 아버지의 알몸을 본 섬진강에서 나는 이미 아버지와 분리되었다. 그러니까 내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간 것은 이데올로기나 국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다. 아버지와 다름을 깨닫고 아버지를 닮고자 서서 오줌을 눌 만큼 아버지는 나의 전부였다. 그 아버지를 이데올로기가, 국가가 빼앗아간 것이다. 

내가 아닌 타자를 나와 같은 존재로 느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네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자신을 일심동체로 여겼던 딸 아리가 아버지의 갑작스런 구속으로 느껴야 했을 상실감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싸늘해지는 것 같습니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언제나 자신에게 전부가 되어 주었던 아버지의 부재는 그녀의 입과 마음을 닫아버렸고, 아버지가 출소할 무렵  십 대의 소녀로 성장한 아리는 아버지와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감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6년 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아버지는 더 이상 딸의 전부도 아니었고 친밀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존재였지만, 죽음을 통해서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하게 됩니다. 죽음 그 자체가 끝이 아니고,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는 작가의 독백같은 문장이 한동안 저를 사로잡으며 그런 부활을 위해 어떤 태도로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사회주의자 부모가 나를 그렇게 키웠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내 부모는 어린 나를 일으켜주지 않았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흘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조금 울다가 별수 없이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렇게 자란 나는 누구 앞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울어본 적도 없다. 이게 바로 빨치산의 딸의 본질이 것이다.

힘들다는 말을 해본 적도없고 울어본 적도 없다는 빨치산 딸의 담담한 고백이 그 어떤 통곡보다 슬프게 다가옵니다. 넘어진 딸에게 따뜻한 손 내밀어 주며 '괜찮니?'라고 한마디만 건네주었다면 어린 아리가 홀로 외로운 시간들을 감내하며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때로는 시의적절하게 건네지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공감 어린 시선이 거창한 이념을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긍게 사램이제... 이 한 마디에 인간에 대한 모든 이해가 다 담겨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 이론도, 이런저런 종교의 자비심을 끌어올 필요도 없이 그저 이 말이면 족한 것 같습니다.  자잘한 일상에서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모든 인간을 향해 '긍게 사램이제'라고 무심히 툭 뱉어내고 돌아서서 아무 일 없었던 듯 또 주어진 오늘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올라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 번으로는 끝내 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사람들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결과물이 인간관계이고 이것이 확장되면 우리네 인생의 한 단면이 되는 것이죠. 한 번으로 끝내 지지 않는 복잡한 마음들이 때론 벗어날 수 없는 늪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순간을 포기하지 않고 아등바등 헤쳐나갈 때 우리는 그 힘에 의지해 일어서고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인정하며  50년을 살아낸 지금에서야 무겁고 무섭고 부러운 그 마음들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윤곽이 그려집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남자로서의 욕구를 드러내는 남편을 자신의 불편한 몸때문에 거절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어머니의 후회가 해학의 극치였던 것 같습니다. 빨치산의 일원으로 죽을 때까지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버리지 못했던 아버지도 결국은 평범한 한 남자에 불과했고, 어머니 역시 빨치산 동지이기 이전에 그런 남편을 품어주지 못한 여한을 떨쳐낼 수 없는 평범한 아낙이었던 겁니다. 우리가 안다고 자부하는 수많은 타인들 역시 천의 얼굴을 가진 존재일 테니 앞으로는 감히 누군가를 잘 안다고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 생전의 분주했던 삶을 마주하게 된 딸 아리처럼 저도 모의 장례식을 통해 저를 알던 사람들이 들려주는 저의 얘기들을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많지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기억을 통해 부활하게 되는 저의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에 빠져들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천의 얼굴까지는 아니어도 여러 측면에서 기억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남은 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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