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가벼운 듯 묵직한 출판가족의 이야기
화려한 표지, 익숙하지 않은 제목이 먼저 시선을 끌었고, 이전에 읽었던 이슬아 작가의 솔직하고 직선적인 스타일의 에세이가 나쁘지 않아서 이 책을 고르게 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주도하는 가부장적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 슬아가 집안의 가장이 되어 모 복희와 부 웅희를 직원으로 거느리며 작지만 효율적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모저모를 이야기로 풀어낸 재밌는 소설입니다. 작가, 출판업자, 글쓰기 강사, 강연자 등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슬아의 어려움과 확실한 소신이 잘 드러나 있고, 비록 부모이긴 하지만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완벽하게 해주는 두 직원의 이야기도 꽤나 흥미진진합니다. 모두가 동의해 오던 표준 가족에 대한 개념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오늘의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가족의 개념과 구성원들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에 여러 가지 시사점을 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늠름한 아가씨와 아름다운 아저씨와 경이로운 아줌마가 보여주는 조화
이제 갓 서른이 넘은 딸 지아는 10권의 책을 출판한 작가이면서 낮잠출판사의 대표로 글 쓰기, 강연, 글 쓰기 강사, 방송사 패널, 모델 등의 다양한 역할에 동분서주하는 캐릭터입니다. 요가와 스쿼트로 아침을 열고,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기 위해 매일 낮잠 시간을 확보하며, 매일 밤마다 이런저런 후회를 하며 마감에 쫓기는 삶을 이어갑니다. 슬아의 부친이자 비정규직 사원인 웅이는 55세로 출판사의 청소와 운전, 배달, 세금 처리 등의 다양한 역할을 정확하고 차질 없이 처리하는 믿음직한 존재입니다. 가부장적인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웅이도 한때는 문학청년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지만,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몸에 익힌 생활 밀착형 기술들을 장착한 맥가이버로 출판사와 슬아 주변의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슬아의 엄마이자 출판사의 일부 업무를 처리하고, 가장 중요한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복희 씨가 있습니다. 유교적인 시아버지 시하에서 그녀가 제공하는 가사노동의 의미는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치부되었지만, 딸 슬아에게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정성 들인 음식으로 가족과 출판사를 찾는 손님들에게 따뜻한 한 끼의 소중함을 전해줍니다.
완벽히 다른 성격의 슬아, 복희, 웅이가 출판사라는 작은 공간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해 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던 것 같습니다. 작품 속에는 가난한 집에 태어난 맏딸 복희가 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포기해야 하는 아픔과 그런 딸을 내내 안스러워하는 어머니 존자의 미안함,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의 의미와 식당 직원을 '이모'라고 호칭하는 것에 대한 부당함, 동성 커플, 지극히 개인적인 브래지어 착용 거부로 인해 정해진 일에서 퇴출되는 일화 등에 대한 작가 이슬아의 관점이 분명하게 잘 드러나 있습니다. 타인의 존재 방식이나 신념, 직업에 대해 어떤 시선을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부분들이 여럿 있어서 저의 그동안의 관점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감상 포인트
강연은 정보 전달 이상의 기능을 해야 한다. 각자의 일로 분주했을 독자들이 집에서 발 뻗고 쉬는 대신 작가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교통체증도 감내하며 찾아온 자리다. 이 시공간은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경험이어야 할 것이다. 슬아는 강연자로서의 자신을 반쯤은 공연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멋지게 입고 강연장에 간다.
이슬아 작가가 강연자로서의 갖고 있는 마인드가 마음에 들었던 부분입니다. 돈과 시간을 할애해 참석한 작가의 강연회에 참석한 독자를 위해 세심하게 공연자 내부 상황을 체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강연 이후에 독자와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가진 작가의 강연회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조부모를 인터뷰하고 작성한 글을 복희가 읽어주는 대목에서 저도 잠깐 울컥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어려웠던 시절 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 기억은 복희와 존자에게도 모두 너무나 아픈 기억이었겠지요. 자신들의 이야기를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낸 슬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복희의 친정 식구들이 느끼는 감정에 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존자의 가슴에 깃든 자유처럼 우리도 삶의 고달픈 시기를 이야기로 만들어 그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면 좋겠네요.
복희가 기쁜 마음으로 무화과를 딴다. 복희에게 아름다움이란 계절의 흐름, 맑은 날에나 궂은 날에나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들. 웅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기쁨의 극치를 다 아는 가수의 목소리. 밥하고 글 쓰는 두 여자. 슬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정하고 힘 있는 언어, 그리고 동료가 된 모부의 뒷모습.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각자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도, 삶의 방식도, 좋아하는 일도 모두 다른 세 사람이 좋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전문성을 지키면서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다면 그 어떤 팀보다 멋진 팀웍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가족이겠지요. 가녀장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삶의 방식은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도, 새로운 가족제도의 필요성을 전제하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처한 고유한 환경에 맞춰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일상의 아름다움과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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