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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by beactive71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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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상사 연구자이자 칼럼니스트인 김영민 서울대 교수가 들려주는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사는 법. 북송시대 문장가 소식의 「적벽부」를 모티프 삼아, 인류의 보편적 문제인 ‘허무’에 대한 오래된 사유의 결과물을 그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포착해내고 재해석했다. 허무라는 주제를 다룬 만큼 죽음과 해골이 등장하지만, 김영민식의 유머와 통찰 덕분에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너무 가볍지 않게 허무를 직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한 이라면 그의 글을 통해 일상을 버틸 수 있는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천천히 읽을수록, 곁에 두고 오래 음미할수록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 사상사 연구자이자 칼럼니스트인 김영민 서울대 교수가 이번에는 ‘인생의 허무’를 주제로 한 인문 에세이를 펴냈다. 앞선 산문집에도 ‘허무’라는 테마는 등장했지만, 오로지 인생의 허무에 대한 그의 사유를 담은 것은 이번 책이 처음이다. 남녀노소 나이불문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어떻게 했을까? 허무의 근원을 깊이 파고들거나 건너뛰거나 무시하거나 또는 극복했을까? 김영민 교수는 “인생은 허무하다”고 직설한다. 허무가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다면서도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고 선언한다. 도대체 허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일까? 저자 김영민은 인간에게 희망, 선의, 의미가 언제나 삶의 정답은 아니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이미 탈진 상태이거나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하거나 텅 비어버린 이들에게 희망과 선의, 의미를 가지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렇기에 저자는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저자의 삶에 대한 태도는 우리에게 허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그 일면을 보여준다.
저자
김영민
출판
사회평론아카데미
출판일
2022.10.31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2018)를 읽으며 작가의 위트와 막힘없는 글의 전개, 뾰족한 시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구입을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도서관에 입고되었다고 해서 예약대출을 통해 읽게 되었네요. 다양한 그림과 시, 영화, 소설, 고전을 인용해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관점과 자세에 대해 설득력 있고 적확한 문장으로 잘 풀어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허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시나요?

김영민식의 유머와 통찰 덕분에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너무 가볍지 않게 허무를 직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한 이라면 그의 글을 통해 일상을 버틸 수 있는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천천히 읽을수록, 곁에 두고 오래 음미할수록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

책 소개란에 쓰여진 글입니다. 초보 독서가로 이렇다 할만한 학식도 갖추지 못한 제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개글에 쓰인 내용처럼 김영민 작가의 지식의 깊이와 다양성이 그만의 독특한 기지라는 도구를 빌어 잘 표현되고 있음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10대 후반부터 어렴풋이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열등감 무력함, 희망도 목적도 없는 삶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의지로 삶을 바꿔보려는 생각보다는 늘 변함없는 비루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그 속에 숨어서 체념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 시절 제가 최근에 읽게 된 여러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면 저의 삶에 변화가 있었을까 자문해 봅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때는 그 책들을 읽고도 공감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서진 성수대교는 말한다. 삶은 온전하지 않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고, 과거에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이 부서져버렸다고, 현재는 상처 없이 주어진 말끔한 시간이 아니라 부서진 과거의 잔해라고, 그러나 그 현재에 누군가 살고 있다고, 폐허를 돌이킬 수는 없으나 폐허를 응시할 수는 있다고, 폐허를 응시했을 때 인간은 관성에서 벗어나 간신히 한 뼘 더 성장할지 모른다고, 성장이란 폐허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폐허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일이라고. 

 

온전하지 못한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폐허! 그 속에서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폐허를 응시함으로써 인간은 성장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제3자의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신의 폐허를 직시하고, 한발 더 나아가 성장하는 일은 분명 아무나 이룰 수 있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한 줌의 용기를 끌어모아 시도는 해볼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이, 우리 사회가 각각의 개인들에게 그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춤에는 흥과 리듬이 필수다. 그뿐이랴. 막춤 아사리판이 아니라, 사교댄스에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파트너란 합을 맞추어야 하는 존재. 파트너와 조화를 이루려면 어느 정도 정신줄을 놓되 완전히 놓지는 않아야 한다. 춤은 배우기 쉽지 않은 고난도의 예술이지만,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유희이기도 하다. 인생 행로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을 댄스 파트너로 간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의 춤장르에 따르면, 인생의 마지막 파트너는 다름 아닌 죽음이다. 심신이 유연하다면, 심지어 죽음마저도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지.

인생을 춤에 비유하며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 파트너로 간주하자는 발상이 참 신선한 것 같습니다. 삶의 한 장르로 죽음을 인지하고, 죽음과의 멋진 댄스 한 판을 염두에 두며 준비한다면 죽음마저도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를 수 있겠지요. 

패턴은 일상의 행동에 작은 전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달아놓는 일이기에, 삶은 패턴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빛나게 된다. 이 반복과 패턴이 자아내는 아름다움과 리듬은 뭔가 지금 제대로 작동 중이라는 암묵적인 신호를 보낸다. 그 규칙적으로 작동되는 세계 속에서 당신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신호를 전해온다. 그 신호에 반응하는 마음이야말로 일상의 어둠에서 인간을 잠시 구원할 것이다.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정처 없이 무너져 내릴 때, 졸렬함과 조바심이 인간을 갉아먹을 때, 목표 없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자기 확신이 그만 무너져내릴 때, 인간을 좀 더 버티게 해줄 것이다. 다른 어떤 글보다 공감했던 부분입니다.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새해가 되어도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당연히 반성과 성찰의 삶과도 완전히 결별했습니다. 일상은 어쩔 수 없이 계속 굴러가야 하는 수레에 지나지 않았고, 그저 의미 없는 최소한의 노동과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생존의 동작으로 지난 10년을 채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내부에서는 나태와 무위에 찌들어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또 다른 자아가 미세하게나마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22년 11월 중순경부터 to-do-list를 기록하고 하루를 돌아볼 수 있는 앱을 이용해서 간단한 루틴을 만들어 꾸준히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2시간 남짓 소요되는 간단한 루틴들을 완료하면서 느끼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생각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걸 깨닫고, 23년 1월에는 본격적으로 다이어리에 하루 계획과 실천, 평가를 기록하면서 작가의 표현처럼 '일상의 어둠'으로부터 저를 구원해 준 패턴의 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시간은 실로 공포스럽다. 지나친 여가는 인간을 공허하고, 무료하고, 빈둥거리고 낭비하게끔 만든다.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일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 공부하는 삶이 괴로운가? 공부를 안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공부를 하는 게 구원이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게 괴로운가? 사람을 안 만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구원이다. 

'촌철살인'이란 말을 이럴 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김영민 교수의 통찰에 감탄하게 됩니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의미와는 전적으로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50이후에는 밥벌이의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여유자적하며 소확행을 누리는 단순한 삶을 막연히 꿈꿔오면서 그런 삶의 이면에 숨어있는 공허한 시간의 공포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틈틈이 즐길 수 있는 일, 재미있는 공부, 재미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진정한 구원'에 대해 고민을 시작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낙방은 낙방. 실연은 실연. 패배는 패배. 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인지와 납득은 다르다. 낙방, 실연, 패배를 인지했다고 해서 마음이 곧바로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선뜻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마음이 그 불편한 현실마저 수용해냈을 때 그것이 바로 정신승리다.

승리는 승리고, 패배는 패배다. 하나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해서 모든 패배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패배도 모든 면에서 패배인 것은 아니다. 모든 관점에서 다 패배인 경우는 없다. 어떤 패배를 해도 인생 전체가 패배로 변하는 경우는 없다. 현실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을 갖는 것이 진정한 정신승리다. 여러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은 '생각하는 힘'을 기른 후에야 얻어질 수 있는 고도의 능력이 아닐까 싶어요. 요즘은 어른 아이 구분 없이 각종 SNS와 유튜브와 같은 매체를 흘끔거리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한편 글이나 책을 읽는 시간은 점점 최소화되는 현실입니다. 저 역시도 몇 달 전만 해도 그런 삶에 익숙했음을 고백합니다. 꾸준히 책을 읽어오기 했지만 리뷰 한 단락 쓰는 것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지는 현실이 비단 저만은 일은 아닐 겁니다. '생각의 힘'을 키움으로써 자신의 패배를 다각도에서 바라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계속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탄력을 갖춘 진정한 정신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인생의 허무를 받아들인 후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누구나 삶의 달콤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만의 달콤함을 찾아 누리면 되는 거겠지요. 삶과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에 순응하면서 마음의 힘을 기르고. 마음의 힘을 낼 수 없을 때는 몸을 움직여 시선을 돌려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오늘부터 '제 삶의 달콤함'을 찾아 누리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볼 생각입니다. 인생, 뭐 별 거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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