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책을 읽게 된 계기
언론인, 정치인, 국문학자,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 초대 문화부장관 등 이어령 선생님을 수식하는 단어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고 화려합니다. 그러나 저는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를 통해 선생님의 강연을 몇 차례 시청한 것이 전부인지라 선생님의 다양한 이력이나 뛰어난 학식, 지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느꼈던 점은 다수의 지식인들에게서 보이는 현학적 태도를 고수하기보다는 선생님의 강점인 비유를 통해 일반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알기 쉽게 풀어서 전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달변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기억이 저로 하여금 이 책에 관심을 갖도록 한 것 같습니다.
라스트 인터뷰,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이 책은 암을 선고받은 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거부했던 이어령 선생님이 김지수 작가와 1년 동안 매주 화요일에 진행했던 열여섯 번의 인터뷰를 정리하여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라고 말씀하셨고, 이것은 이 인터뷰의 핵심이기도 하다고 김지수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라고 생각해 오던 저에게는 다소 어려운 문장이지만,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삶은 절반의 진실을 놓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어. 죽음에 대해 쓰는 거지. 벼랑 끝에서 한발짝 더 갈 수 있다네. ‘사람이 어떻게 끝나가는가’를 보고 기록하는 것이 내 삶의 마지막 갈증을 채우는 일이야. 내가 파고자 하는 최후의 우물이지. 암이 내 몸으로 번져가는 것을 관찰하면서 죽음에 직면하기로 한 것은 희망에 찬 결정이란 말일세.
죽음 앞에서 초조해하며 의료적 도움에 의지해 생명을 연장하려고 몸부림치는 대신, 글 쓰는 사람으로서 정면으로 죽음과 대면하며 죽음을 기록하고자 했던 선생님의 소명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던 책입니다.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책을 펼치고 첫 페이지에 쓰인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갑자기 먹먹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직은 저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그 말에 수긍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내 경제적 약자로 살아오면서 제 안에는 어느 정도의 좌절과 패배감이 상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50이 넘은 지금은 이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들이 차지하던 그 자리에 '감사하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소낙비와 단풍잎에 비유되는 죽음이라니...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죽음이 계절처럼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리다가 삶의 일부로 포용해야 하는 것이 되겠지요.
발톱 깎다가 /눈물 한 방울/너 거기 있었구나, 멍든 새끼발가락
암세포가 기억을 지워버려 공백으로 남은 자리에 이어령 선생님은 지우개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로 공백을 채워간다고 하시며 쓴 시입니다. 8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한 번도 관심을 준 적 없었던 새끼발가락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쓴 세 줄의 시를 읽으며 마치 제 자신이 새끼발가락이 된 양 위로를 받습니다.
나는 말일세. 오히려 스마트폰 보며 혼밥 하는 장면보다 스마트폰이 양복 주머니에서 툭 불거져 나온 모습에서 직장인들의 ‘고독의 덩어리’를 봐. 남자들 호주머니를 보게. 스마트폰을 넣어서 축 처져 있지. 축 처진 양복 호주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남자들이 참 애잔해. 그 울퉁불퉁한 고독, 숨겨도 숨길 수 없는 고독 때문에. 여자들은 핸드백 들고 다녀서 모르지. 남자들의 축 처진 양복 호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애잔함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어령 선생님께 "남자의 얼굴에 수염 그림자가 생길 때, 여자는 립스틱 자국이 지워진답니다."라고 기지 넘치게 받아치는 김지수 작가는 말에 감정이입이 되어 좀 웃었습니다.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 그 외로움이 모든 사회생활에 불리하지만, 그런 자발적 유폐 속에 시가 나오고 창조가 나오고 정의가 나오는 거지. 둥글둥글,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의 세계에선 관습에 의한 움직임은 있지만 적어도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자가 발전의 동력은 얻을 수 없어. 타성에 의한 움직임은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다고. 작더라도 바람개비처럼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기만의 동력을 가지도록 하게. 백 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아.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의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생각이 날개를 달아주거든. 그래비티, 중력에 반대되는 힘, 경력이 생기지. 가벼워지는 힘이야. 그런 세계에서는 사실 ‘사회성’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아.
어려서부터 질문하는 사람이었고, 한번 문제를 붙들면 풀릴 때까지 놓지 않았던 이어령 선생님은 주변으로부터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경계의 대상이 되어 외로웠다고 고백합니다. 무리에서 조금이라도 튀거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공공의 적이 되어 소외당하거나 짓밟히는 우리 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사회적인 성공을 이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육체와 마음, 영혼의 상관관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어령 선생님의 명쾌한 비유 덕분에 모호함이 해결된 느낌입니다. 육체는 컵과 같은 물질이므로 비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하면서 마인드를 지탱해 줍니다. 마인드는 컵을 채우는 액체로 변화무쌍하지만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컵이 채워지지 이전의 void로 우주에 닿는 영혼은 육체의 죽음과는 무관하게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영혼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 것 같습니다.
배꼽을 만져보게. 몸의 중심에 있어. 그런데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지. 지금은 막혀 있지만 과거엔 뚫려 있었지 않나. 타인의 몸과 내가 하나였다는 것, 이 거대한 우주에서 같은 튜브를 타고 있었다는 것. 배꼽은 그 진실의 흔적이라네. 혹 배꼽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누워서 몸 위에 찻잔을 놓아보게. 어디에 놓을 텐 가? 이마? 커? 아냐. 배꼽밖에는 없어.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우리의 신체에서 존재감 제로인 배꼽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알고 계셨나요? 사소한 물체나 신체 일부를 철학적 사유로 연결시켜 설명하시는 능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고, 이 책을 통해 선생님이 평생 쌓아올린 지식의 일면과 마주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 one이야. 무리 중이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끌어안겠나? 내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어? 그런데 ‘나 없는 우리?’ 아니 될 말씀이야. 큰일 날 소리지. 그래서 내가 사이를 강조했잖아.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거지. 갈수록 inter가 중요하죠. 중요해. 앞으로 점점 더 interface 접속장치가 중요해.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겠지만, 또 컵의 것만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그런데 또 한편 컵에 손잡이가 아니라 자기 이름이 쓰여있다고 생각해 봐. 갑작스럽게 내 것이 되잖아. 같은 사물인데도 달라지는 거야. 유일해지는 거지. 이런 생활 속의 생각이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되는 거라네.
'inter'의 중요성을 컵과 손잡이에 비유해 손쉽게 설명하시는 부분에서 또 한번 이어령 선생님의 탁월한 전달능력에 감탄한 것 같습니다. 어려운 지식을 쉬운 언어로 풀어서 타인을 이해시키는 능력이야말로 학자의 제1 필요조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을 덮으며...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은 때로는 순수한 아이의 여린 감성으로 제 마음을 두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쇠락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인내하며 지금 순간에 가능한 일들을 하려고 노력하는 결연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미처 다가갈 수 없는 위대한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말씀들은 부족한 저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고, 남아있는 시간 동안 꾸준한 공부함으로써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을 시의적절한 질문으로 잘 풀어내어 전달하려는 김지수 작가의 인터뷰어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 책인 것 같습니다. 23년 연초에 이런 좋은 책을 만난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습니다. 재독을 통해 선생님이 전하고 싶었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삶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제 삶을 이끄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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